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율리우스 카이사르 (문단 편집) == 여담 == * 명언을 여럿 남겼다. "위대한 결정은 다만 수행될 뿐이다. 심사숙고하는 게 아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등의 명언이 이 사람의 말이다. 또 유명한 대사로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라는 유언이 있다.[* 실제 어감은 "이 개같은 새끼!" 정도의 욕설이라고 하는데, 진짜로 카이사르의 유언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말은 로마판 황색언론으로 평가받는 [[수에토니우스]]의 저작에서 유래했고, 다른 사료에서는 유언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는 "카이사르의 진짜 유언은 '''"아아아아악"'''이었을 겁니다."라는 매우 현실적인 개드립을 치기도 했다.[[https://www.theguardian.com/notesandqueries/query/0,5753,-1156,00.html|#]] 실제로 카이사르는 암살자들에게 포위당한 채 몸을 20군데가 넘게 찔려 사망했으니, 순식간에 윽윽윽... 하다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 정설에 가깝다.] 다만 유언이 신빙성이 없듯, 다른 명언들도 상당수 후대의 창작이라는 설이 있다. 카이사르가 한 말이 100% 확실한 것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하나다. * 희한한 점은 충분히 자신에 대한 암살기도를 예측하고도 남는 사람이었음에도 불안하게 살고 싶지 않았던 마음 때문인지 [[경호원]]을 제대로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이 점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술라]]와 비슷하다. 신변 경호를 충고하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평생 불안하게 숨어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 결국 이는 암살로 이어졌고 이에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투스]]는 평생 강력한 경호원과 근위대를 이끌고 다녔다. * 카이사르가 죽은 곳은 폼페이우스가 생전 건축했던 폼페이우스 포룸이었다. 그날은 그곳에서 원로원 회의가 열렸기 때문. * 참고로, 카이사르의 저서 갈리아 전기에서는 객관적인 서술을 위해 본인을 칭할 때 '카이사르는 XXX 했다'라는 식으로 썼다. 그랬기 때문에 후반, 그러니까 암살 이후에 쓰여진 부분에서는 카이사르 본인이 아니라 부관(심지어 그 전장에 있지도 않았다)이 쓴 것이라서 원문을 보면 사실상 다른 문장으로 보일 정도이다. * 카이사르는 최초로 [[제왕절개|어머니의 배를 갈라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으며, 이 때문에 산모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는 수술을 '''제왕''' 절개('''帝王'''切開, '''Caesar'''ean section)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물론 후세에 만들어진 전설로, 실은 '절개'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의 철자가 카이사르의 이름과 비슷해 영어로 번역될 때 와전된 것이 유래다.[* 이 시기 [[제왕절개]] 수술은 마취 따위 없이 말 그대로 생살을 가르는 수술이었다. 당연히 그에 따른 고통과 출혈량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산모의 죽음을 의미했으며, 산모가 가망이 없거나 사망했을 때 아이라도 살리고자 시행했던 말 그대로 응급 수술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이 이후에도 역사상에 등장하므로, 이는 말 그대로 전설임을 알 수 있다.] * 흥미로운 점은 유럽 역사상 최초의 실질적 황제였으나 '''그는 단 한 번도 군주로 불린 적도 없고 왕으로 추대되거나 군주의 자리에 오른 적 또한 없었다.''' 상술했듯 로마의 근간 그 자체인 공화정을 흔듦으로써 로마 시민들의 반감을 사는 불안한 통치를 하고픈 마음이 없었기에 그랬던 것. 따라서 그는 자신의 원래 군인으로서의 직위였던 '[[임페라토르]](Imperator - [[라틴어]]로 [[최고사령관]]을 뜻한다.)'[* 어떻게 보면 명목상의 최고 존엄은 따로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장군이 최고 정치 역할을 겸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쇼군]]과도 비슷한 케이스이다. 물론 파고들면 세부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많긴 하지만.]라고 불리웠는데, 이것이 변형되어 오늘날의 Emperor, 즉 황제를 일컫는 단어가 되었다. 문제는 이 때문에 후대의 독재관들 또한 감히 스스로를 군주로 호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카이사르가 군주를 자칭하지 않은 판국에 카이사르만큼 대단한 업적을 세우지 않고서 군주를 자칭하는 건 그냥 '나는 독재관이 뭔지도 모르면서 닥치고 자리에 오르고 본 욕심만 더럽게 많은 못난 놈입니다'라고 [[나를 죽여줘|공개적으로 자살 선언을 하는]] 행위에 불과할 뿐이니... 그나마 그의 뒤를 이은 양아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정당한 후계자라는 정통성에다가 본인 스스로도 많은 업적과 공을 세운 인물이다 보니 '''제1시민(Princeps)'''이라는 전용 직함을 신설하긴 했는데, 이것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행정, 군대 등 로마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힘을 지녔으나 어쨌건 __시민__'이라는 뜻의 직함으로 절대로 군주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이 역시 후대에 군주를 뜻하는 [[프린스|Prince]]로 바뀌었으니 그야말로 부전자전. 이렇다 보니 로마의 역대 독재관들은 그냥 [[카이사르(칭호)|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칭호)|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직함을 대신해서 썼다. 로마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황제 = 엠퍼러'니까 로마 황제들은 '엠퍼러'(좀 알아도 '임페라토르')를 호칭으로 썼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상기하였듯 임페라토르는 최고사령관을 일컫는 호칭으로 이는 로마의 독재관이 지닌 수많은 호칭들 중 하나에 불과한 호칭이었다. 최고사령관(임페라토르) + 최고정치가 + 최고경제관 + 최고산업관 + 최고행정관 + 최고집행관 + 최고법무관... 등을 하나로 모아서 카이사르라고 불렀다. 즉 '그 일들을 한 사람이 카이사르, 즉 나도 카이사르이니 같은 일을 하는 존재임'이라는 식으로 퉁쳐서 썼다. 간단하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계승한 자'라는 의미였던 것.[* 이렇게 선대의 이름을 계승함으로서 자신이 선대를 계승한 존재임을 선언하는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었다. 당장 한국만 해도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고구려의 진짜 이름인 '고려'를 자기 국명으로 삼은 것이고 단지 편의상 구분을 위하여 고씨 가문의 고려를 고'구'려로 바꿔서 부른게 굳어져 온 것이다. 즉 진짜 삼국시대 당대의 [[백제]], [[신라]] 사람들은 그 북방 국가를 '고려'라고 불렀지 '고구려'라고 부르지는 않았다는 것. 실제로 왕씨의 고려 이전, [[남북국시대]]에서 고려(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주장한 [[발해]] 역시 '발해'는 중국으로부터 수여받은 국명이었고 자체적으로는 '고려'를 국명으로 썼다. 발해의 [[문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당당하게 "나 __고려왕__ 대흠무는..."이라고 쓴 글귀도 남아 있다. [[조선]] 또한 마찬가지로 원래 [[단군왕검]]이 건국한 국가의 이름은 [[고조선]]이 아니라 '조선'이었으나 후에 [[이성계]]가 고려를 전복하고 새로이 국가를 창건하면서 "고려는 고구려만 계승했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조선을 계승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국가다"라는 명분으로 건국을 정당화하고자 국명을 조선으로 칭하면서 단군왕검의 조선을 편의상 '고'조선으로 바꿔서 부른 게 굳어져 온 것이다.] 예를 들자면 '[[네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즉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자리를 물려받은자 네로'라는 식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22:21에도 나오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는 구절의 카이사르는 진짜 이 이름을 갖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당시에 재위하던 [[티베리우스|로마 황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의역을 한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정도. 이 문화 또한 '임페라토르→엠퍼러'와 마찬가지로 후대 유럽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신성 로마 제국]]이 위치한 독일 지방에서는 카이사르를 독일어식 '[[카이저]]'로 만들어 황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했고, [[러시아 제국]]에서는 카이사르를 러시아어식 '[[차르]]'로 읽어 황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이 외에도 폴란드 지방에서는 카이사르를 폴란드어로 읽어 '체사르쉬(cesarz)'로 만들어 황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유럽권의 역사상 첫 황제답게 여러모로 서구권의 '황제'의 대명사가 된 셈. * 그의 생일이 포함된 달인 [[7월]](July)의 명칭은 원래 Quintilis였는데,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율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변경되었다. 더불어 [[8월]](August)은 Sextilis에서 자신의 이름을 따서 바꾸었다.[* 후대의 수많은 로마 황제들이 자신의 이름을 넣어 월의 이름 바꾸려고 시도하였으나,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뿐이다.] 참고로, 이 때문에 달력이 2달씩 밀렸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율리우스력 이전에는 10개월짜리 달력밖에 없었는데, 겨울에 해당하는 2개 달이 달력에 추가되고, 카이사르가 율리우스력을 확정하면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즉 9월부터 12월까지는 2개월씩 밀려난 건 맞는데, 카이사르 때문에 밀린 건 아니라는 소리. [[태양력#s-1.2]] 참조. * 유명한 대머리였고, 이 때문에 병사들이 개선식을 하면서 대머리라고 놀리는 구호를 외치기도 할 정도였다. 1980년대 미국의 학술단체에서 카이사르의 탈모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는데, 그 연구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귓머리만 조금 있는 정도의 심각한 탈모였다고 한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탈모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양 귀밑머리를 길게 길러 정수리까지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본인의 대머리를 가렸는데, 이 경우 정수리에서 만난 머리가 마치 닭벼슬처럼 붕 뜨게 된다.[* 서양에서는 이런 머리 스타일을 카이사르 컷 혹은 시저 컷이라 부른다.] 그리고 종신 독재관이 된 후에는 이런 머리 스타일을 고정하기 위해 월계관을 쓰고 다녔다.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있었을 때는 이집트의 비법이랍시고 [[악어]] 똥을 발랐다고 한다. 물론 현대 의학으로도 못 고치는 걸 고대 이집트의 비법으로 고칠 수 있었을 리 없었다. *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피나 [[수급|잘린 머리]]를 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잘라다 바치자 보는 것을 거부했다. 어릴 적 술라의 대숙청 때 광장에 쌓여 있던 머리들을[* 그중에 자신의 친척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고 트라우마로 남았다는 설이 있다. * 어릴적엔 마르고 연약했지만 어릴 때부터 말은 잘 탔다고 한다. 당시에는 말 위에서 발을 거는 등자가 없었을 시기다. 때문에 단순히 허벅지 힘만으로 말을 조이고 그 위에서 무기를 다뤄야 했다. 그래서 고대에는 기마병이 흔치 않았고 고급 인력이었다. 어린 카이사르가 두 손을 머리 뒤로 하고 말을 타는 모습에 어머니인 아우렐리아가 기겁했다고 한다. 그리고 운동을 좋아하고 부단히 체력 단련을 해서 마른 몸에도 불구하고 젊은 군단병들에게 밀리지 않는 강건한 체력을 가지게 되어 병사들이 겉모습만 보고 무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갈리아 전쟁 당시 20대 초중반의 군단병에 비해 카이사르는 40대를 넘긴 나이였다. 당시에는 이미 아버지뻘 나이이고 무엇보다 카이사르는 전투뿐 아니라 보급, 병참, 전략, 정치, 현지 안정화 등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는 격무에 시달렸다. 호리호리하고 격무에 시달리는 아버지뻘 지휘관이 아들 나이대의 정예병들과 대등한 체력으로 싸웠다는 건 충분히 존경받을 일이었을 것이다. 문다 전투에서는 200개의 투창을 홀로 받으면서 선두에서 적군과 싸워 사기를 끌어올리기도 했다. * 카이사르의 정적이었던 [[소 카토]]가 "로마가 멸망했을 때 유일하게 술에 취하지 않고 걷는 사람일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알코올에 기대지 않았다.[* 반면 그의 정적인 소 카토는 알코올 중독이 의심될 정도의 술 애호가였다.] 밥도 산해진미를 즐기지 않고 적당히 먹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편식하는 것도 아니고 잘 먹었다. 초대받는 자리에서 집주인이 음식을 잘못 요리해 모두가 불평할 때 "애써 만든 건데 주인이 얼마나 민망하겠나" 하면서 혼자 맛있게 먹었다는 일화가 있다. 아우구스투스와의 공통점은 둘 다 당대 로마 귀족들과 달리 미식에 전혀 관심이 없었음에도 직접 음식, 인테리어 매뉴얼을 만들 정도로 손님 대접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카이사르는 전쟁터에서 단련돼서 그런지 이것저것 주는 대로 잘 먹었으나 아우구스투스는 소화 불량으로 평생을 소식했다는 점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장수 비결을 소식에서 보기도 하지만. * 젊을 적 남을 위해 호의를 많이 베풀었는데 도움을 받고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남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위해 돈을 쓰고 다녔다고 플루타르코스와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다. 이는 남에게 빚진 마음을 심어주었고 나중에 정치적 자산이 된다. 심지어 돈을 빌려주기 위해 남한테 돈을 꾸기도 했는데 아예 돈이 없는 사람에겐 빌려주지 않았다. 이때 "당신에게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전쟁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 어느 촌락 집에 머무는 중에 몸이 아픈 부하에게 편한 자리를 양보하고 본인은 불편한 곳에서 잠을 잤다. 그러면서 "약한 사람에겐 편한 자리를, 위대한 사람에겐 명예로운 자리를..."이라고 말했다 한다. * 그의 장군들에게 오른손잡이 악수를 보급한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잘 쓰는 손을 잡고 있으니 '''무기를 휘두를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카이사르 본인은 왼손잡이였으며, 따라서 오른손으로 악수하면서 무기를 휘두르는 '못미더운 왼손잡이'의 이미지를 로마에 보급한 장본인이라는 것.[*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카이사르는 왼손잡이였지만, 글은 왼손으로 쓰고 전쟁터에서는 칼을 오른손으로 잡았다.] 군대 같은 경우에는 전술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대세에 맞춰서 누구나 오른손에 무기를 쥐어야 했고, 따라서 오른손을 잡는 제스처가 그럭저럭 문제없이 받아들여졌을지 모르겠지만.[* 당장 방어 무기를 들지 않는 오른쪽에 대해 대놓고 '''노출된 측면'''(latere aperto)이라는 표현이 카이사르 본인의 저서인 '갈리아 전쟁기'에서도 나오며, 로마 군단병은 모두 일렬로 합을 맞춰야 했기 때문에 왼손잡이, 오른손잡이에 상관없이 오른손에 칼, 왼손에 방패를 들어야 했다. 지금까지 발굴된 수많은 로마 시대 군단병 무기 중에서 왼손잡이용 칼과 방패가 발굴된 적은 한번도 없다. 기술이 발달한 현대의 제식소총도 왼손잡이용이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해보자.] * 카이사르도 군대의 파업을 겪은 적이 있다. 야전 종군거부, 그러니까 복무 중 즉시 전역요구 자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루쿨루스같은 명장들도 겪었던 문제지만 카이사르는 말 한마디로 군대가 스스로 파업을 그만두게 만들었다. 설명하자면,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병들은 유독 카이사르의 지휘를 받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는데 그 중 가장 카이사르의 총애를 많이 받는 [[10군단 에퀴스트리스|10군단]]이 한창 전쟁중에 봉급인상을 노리고 종군을 거부한 채 즉시 전역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벌써 남을 대하듯이 "그래 아저씨들 잘가요~' 한마디만 하고는[* 정확히는 10군단을 '시민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원하는대로 전역 시키고 전역에 따른 보상을 모두 지불할테니 해산하라고 하였으며 나머지를 이끌고 출병했다. 10군단은 카이사르와 가까웠던 군단이기도 하며 갈리아 원정 때부터 함께 한 베테랑들이었는데 이들을 평상시 부르던 '전우'가 아닌 '시민'이라 부른 것은 감정적으로도 동요시킨 것이다.] 10군단을 열외시킨채 그냥 가버렸고, 10군단은 봉급이상의 봉 자도 못꺼내고는 터덜터덜 카이사르를 따라가야했다. 카이사르도 전쟁하느라 군단병 한명이 아쉬웠지다지만, 제10군단이 없어도 카이사르는 카이사르지만 카이사르가 없으면 10군단은 10군단이 아니게 되버린다는 점을 잘 파악했던 묘수라고 할 수있다. * 여담이지만 시대의 영웅이라고 추앙받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상당히 늦은 나이에 일어섰다는 특이한 사항이 있다. 나이 마흔에 되어서야 겨우 두각을 드러냈기에 아주 빠른 속도로 로마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셈이다. 다만 따지고 보면 카이사르의 출세는 늦은 편이 아니라 로마의 정상적인 엘리트 코스였고, 동시기 인물 중에서 그보다 더 빨리 출세한 인물은 키케로나 젊은 시절에 술라의 내전이라는 특수 상황이 있었던 폼페이우스 정도였다. 그런지라 사실은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다른 인물들은 특이하게 이른 나이부터 두각을 보이고, 정석 코스를 밟은 다른 인물들은 카이사르만큼 걸물이 아니었던 것'에 가깝다.[* 또한 카이사르는 젊어서부터 민중파로 유명했으므로 착실히 엘리트 코스를 밟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승승장구했던 술라파가 아닌 이상 탈법행위를 맘껏 저지를 수도 없었고 또 그런 짓을 했다가는 원로원의 반대파로부터 무슨 말을 들을 지도 몰랐을 테니까.] * 로마 원수정(프린키파투스) 시대의 [[플라비우스 왕조]]~[[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의 변호사, 역사가이자 황실 비서 출신인 [[수에토니우스]]가 극도로 혐오한 로마인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카이사르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극도로 혐오하고 미워한, 제정 시대의 심정적 공화주의자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비슷하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좋아하지 않은 동시대의 [[타키투스]]와 달리, 본인과 그 집안이 카이사르와 그 일가에게 피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6명에 관하여는 지독할 정도로 거짓 소문까지 본인 창작과 길거리 뜬소문까지 결합해 실어 놓았다.[* 타키투스의 경우, 장인 아그리콜라의 부친(아내의 할아버지)이 칼리굴라 황제 시절, 반역죄로 유죄가 명확히 결정돼 기소될 황족을 법대로 기소하는 것을 거절한 명령 불복종죄로 처형당해 일말의 원한이라도 있을 법했다. 그렇지만 그는 아내의 할아버지가 현직 법무관임에도 명령 불복종 혐의로 처벌받아 죽임을 당한 것을 증오한다고 표현하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했다. 당장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이렇게 된 것에는 티베리우스 시대에 겪은 카이사르 가문의 비극 때문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기술했고, 저서 역시 특유의 수사체로 진실, 소문, 작자의 추측을 명확히 구분해 서술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와 그 가문이라면 이를 갈 정도로 증오했다. 물론 카이사르를 다룬 <카이사르> 편의 도입부는 율리우스 씨족과 카이사르 집안 이야기는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그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저서 <황제열전> 중 3대 황제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마지막 남성 [[칼리굴라]]를 다룬 <가이우스>편에서 다음과 같이 카이사르와 그 일가의 증오심을 표출했다. > 민중은 '가이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카이사르 집안 사람은 모두 칼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중 최초는 키나 시대에 살해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카이사르의 아버지)였다. >----- >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가이우스>, 60 수에토니우스는 이 편에서 카이사르의 부친과 카이사르, 가이우스(칼리굴라) 모두 개인 이름이 가이우스인 만큼 모두 칼에 맞아 죽었다면서 통괘함까지 표현했다고 평가받는데, 이를 번역한 이들조차도 아예 틀렸음을 지적할 정도로 그 적개심이 노골적이라고 까이고 있다. 물론 제정 시대 당시, 카이사르는 신격화된 데다 국부로 찬사받은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를 대놓고 비난하는 것은 후폭풍이 큰 탓에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대해선 직접 비난은 최대한 자제하긴 했다. 참고로 수에토니우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 황후에 대한 불경죄로 목숨만 겨우 건진 뒤 사회적으로 매장됐다. 이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비나 황후에 관해 뒷담화를 했던 것이 황제 귀에 들어간 것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죄목 외에도 여러 가지가 걸려 그와 친하게 지낸 인사들까지 큰 고초를 겪고 수에토니우스는 이후 원로원 귀족들에게도 믿지 못할 호사가로 찍혀 완전히 매장됐다고 한다. 이에 학자들은 제 아무리 까칠하기로 유명한 하드리아누스라고 하더라도, 이 당시 수에토니우스가 자신의 저서 몇 권을 헌사한 이들과 함께 국부 아우구스투스와 정통성을 인정받은 황제들의 그 정통성을 혐오한 것도 걸렸기 때문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수에토니우스가 자신의 저서에 적은 자랑 글처럼 어린 시절 아우구스투스의 청동상(꼬마 투리누스 청동상)을 찾아오도록 한 뒤, 이를 받자 극도의 경외감을 표하며 이를 자신의 침실에 모신 황제로 유명했다.] 심정적 공화주의자로 걸린다면, 이는 반역죄로 기소될 죄목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수에토니우스가 카이사르와 그 일가를 다룬 기록들은 대차대조 연구와 유적, 유물 발견 및 비문 해석 등으로 그의 주장이 대부분 틀린 것이 많다고 밝혀지면서, 근대 이후 전 세계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황색 언론]]'이라고 까이고 있다. * [[배째라]] 식의 악질 채무자이기도 했는데 높은 지위라는 신용을 이용하여 너무나도 많은 빚을 빌리면 돈을 빌려준 사람이 오히려 쩔쩔맨다는 걸 악용하여 [[지곤조기|지금은 조금 곤란하며]] 나중에 갚을 것이며 [[아몰랑|그 날은 내가 정하지만 나도 모른다.]] 라고 하였고 카이사르가 실각되면 채권자들은 한푼도 못받을 것이기에 채권자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카이사르의 지지자가 되었다.[* 다만 이건 오해가 좀 있는데 당시에는 카이사르 이상으로 빚을 진 자들이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카틸리나 탄핵으로 유명한 카틸리나도 엄청난 빚을 진 상태에서 집정관 선거에 낙선했기 때문에 반역을 일으키려 계획했었고, 카이사르의 지지자이기도 했던 젊은 정치 신인 쿠리오는 카이사르보다도 훨씬 더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사실 애시당초 카이사르에게 돈을 가장 많이 빌려준 사람이 당대 로마 제일의 부호였던 크라수스였는데 크라수스의 재산은 거의 로마 1년분 예산과도 맞먹을 정도였기 때문에 카이사르에게 빌려준 돈 정도는 크게 문제가 되지도 않았고 울며 겨자먹기로 카이사르의 지지자가 될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크라수스와 카이사르의 관계가 매우 양호했던 것은 카이사르가 크라수스에게 엄청난 이득이 되었기 때문인데 당장 카이사르는 크라수스, 폼페이우스를 끌어들여 거물급 정치가인 삼두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즉, 카이사르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늦어도 삼두정치 때까지는 빌린 돈이 그 값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며 이런 결과를 가져다 준 카이사르를 오히려 열렬히 지지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